
밤마다 멈춰 서는 자리, 붉은 병 하나로 배운 리듬
야시장에서 돌아오는 길은 늘 비슷했지만, 어느 날부터 아파트 입구에서는 발걸음이 자동으로 늦춰졌다. 낮에는 안내판과 경비실 사이에 숨은 장식처럼만 보이던 작은 제단이, 해가 떨어지면 전혀 다른 공간이 되었다. 유리 타일까지 잔잔하게 번지는 조명, 네 방향을 향해 앉아 있는 금빛 조각상, 겹겹이 걸린 주황색 마리골드 꽃목걸이, 그리고 바람이 스치면 짧게 울리는 작은 방울 소리. 지나가던 사람들도 오래 머무르진 않았다. 오토바이 헬멧을 벗어 들고 두 손을 모은 뒤, 금빛 항아리 옆에 무엇인가를 올려두고 곧 다시 각자의 밤으로 돌아갔다. 가까이 다가가 보고서야 그 ‘무엇’이 붉은색 음료라는 걸 알았다. 대부분 뚜껑이 열려 있고 빨대가 꽂혀 있었는데, 새 삼각김밥 포장을 뜯는 소리, 배달 앱 알림의 짧은 진동, 타이어가 젖은 바닥을 스치는 소리와 함께 그 빨간 병들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왜 빨대를 꽂아 두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경비 아저씨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아저씨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달고 향이 진하니까요. 오늘 무사했던 마음, 내일도 잘 부탁한다는 마음을 이렇게 올려두는 거예요”라고 짧게 답했다. 긴 강의보다 그 한마디가 더 또렷했다. 이 도시에선 하루의 끝마다 ‘수고했다’는 말을 이렇게 남기는구나. 낯섦이 예의로 바뀌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켰다. 한국에서 배운 적 없는 ‘멈춰 서는 법’을, 여기서는 이렇게 간단한 동작으로 익힐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나도 따라 해 보자
그날 밤, 옆 편의점 냉장고에서 같은 음료를 꺼내 들었다. 병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손등으로 또르르 흘렀고, 차가운 유리의 촉감이 순간 마음까지 차분하게 만들었다. 계산을 마치고 제단 앞에 서니 향 냄새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진하게 올라왔다. 괜히 서툴러 보이면 어떡하나, 방법을 잘 몰라 실수하면 어떡하나, 속으로 자꾸 생각이 길어졌지만, 결국 병 표면의 물기를 티슈로 닦아내고 라벨이 정면을 향하도록 돌렸다. 뚜껑을 비트는 “칙” 소리가 작게 났고, 나는 빨대를 천천히 꽂아 테이블 가운데로 살짝 밀어 놓았다. 합장하는 정확한 법을 아는 건 아니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정중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한국어로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 무사히 지냈고, 내일도 크게 다치지 않게 해 주세요. 실수하면 빨리 고치게 해 주세요. 멀리 있는 가족이 아프지 않게 지켜주세요.” 특별한 문장을 준비한 건 아니었다. 다만 오늘에 대한 짧은 감사, 내일을 위한 작은 부탁을 한데 묶어 놓았을 뿐이다. 고개를 드니 꽃목걸이를 더하던 아주머니가 “예쁘게 올리셨어요”라고 웃으며 내 병을 중앙 쪽으로 한 뼘 옮겨 주었다. 그 말 한마디에 어색함이 스르르 풀렸다. 사진으로 남길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기록보다 예의를 먼저 챙기고 싶었다. 바람이 지나가며 빨대 끝의 작은 방울이 한 번 들썩였고, 그 미세한 움직임이 “잘 도착했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뒤돌아보니 금빛 조각상은 멀리서도 또렷했다. 낯선 도시에서 처음으로 내 호흡이 여기의 박자에 맞춰 붙는 순간이었다. 그날 밤은 유난히 잠들기 쉬웠다. 창문을 조금 열어 두었더니 오토바이 머플러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섞여 들어왔고, 그 소리마저 평온하게 들렸다.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해 보자
다음 날 아침, 일부러 같은 길을 다시 걸었다. 밤새 타들었던 향은 거의 다 사라져 있었고, 꽃목걸이는 한 겹 더 늘어 있었다. 내 병의 빨대는 아주 조금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누가 한 모금 마셨을 리는 없고, 아마 빨대가 눌리면서 내려간 것일 텐데, 별것 아닌 그 변화가 이상하게 반가웠다. 어젯밤의 마음이 이 자리 어딘가에 아직 남아 있는 느낌이 들어서다. 경비 아저씨는 먼저 “오늘은 덜 더울 거래요”라고 말을 건넸고, 나는 한국어로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하며 짧게 합장을 올렸다. 몸이 먼저 기억하기 시작하니, 어제의 낯섦이 오늘의 습관으로 바뀌었다. 버스 창밖으로 골목이 멀어질 때, 머릿속에 세 가지를 적었다. 하루에 한 번은 꼭 멈춰 서서 마음을 정리할 것. 고마운 일은 그때그때 바로 말할 것. 낯선 문화 앞에서는 사진보다 질문과 예의를 먼저 꺼낼 것. 그 세 가지를 지키다 보면, 이 도시의 속도가 불편한 ‘차이’가 아니라 배울 만한 ‘간격’으로 느껴질 것 같았다.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가더라도 책상 한쪽에 작은 자리를 만들어, 오늘의 감사 한 가지와 내일의 다짐 한 줄을 놓아두자고 마음을 정했다. 붉은 병 하나로 배운 건 종교 이야기가 아니었다. 바쁜 하루를 잠깐 멈춰 세우는 법, 낯선 곳에서 예의를 빌려 쓰는 법, 그리고 그 잠깐의 멈춤이 생각보다 오래 마음을 편하게 한다는 사실이었다. 해가 지면 제단의 조명은 다시 켜질 것이다. 누군가의 피곤함과 누군가의 소원이 그 앞에서 포개지고, 빨대 끝 작은 방울이 또 한 번 들썩이겠지. 그 움직임을 떠올리면, 오늘의 속도도 한 박자 낮출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또 다음 날이 와도, 나는 그 앞에서 잠깐 멈출 것이다. 어제의 나에게 수고했다고, 내일의 나에게 잘 부탁한다고, 조용히 말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