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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서 한 달 살아보니 달라진 생각

by Koriland 2026. 2. 13.

여행자의 시선이 사라지고, 반복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 태국에 도착했을 때 나는 철저히 여행자였다.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새로웠다. 간판의 글씨체, 오토바이의 밀도, 공기 속에 섞여 있는 향신료 냄새까지. 하루 일정은 빼곡했고, 지도에 저장해 둔 장소를 하나씩 지워가는 게 목표처럼 느껴졌다. 유명한 사원을 보고, 야시장에서 음식을 사 먹고, 카페를 찾아다니며 사진을 남겼다. 그 며칠은 빠르게 흘렀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자 조금씩 달라졌다. 더 이상 매일 새로운 곳을 찾지 않았다. 같은 편의점에 다시 들어가고, 같은 길을 두 번 걷게 됐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반복되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반복이 오히려 안정감을 줬다. 아침마다 같은 시간에 마주치는 경비원, 저녁마다 북적이는 노점, 습관처럼 들르는 카페. 그 순간부터 나는 관광객이 아니라 이곳에 잠시 머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반복은 낯섦을 줄인다. 낯섦이 줄어들면 공간이 배경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가 된다. 스콜이 갑자기 쏟아져도 “일정이 망했다”가 아니라 “잠깐 기다리면 되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길이 막히면 조급해하기보다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내려놓게 됐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짧지만, 반복이 생기기엔 충분했다. 그 반복이 나의 시선을 바꿨다.

더위와 느림이 나를 바꿔놓았다

태국의 더위는 처음에는 적응하기 어려웠다. 햇빛은 강했고, 습기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밖에 잠깐만 서 있어도 땀이 흐르고, 옷이 금세 젖었다. 한국에서는 일정이 촘촘할수록 뿌듯했는데, 여기서는 그 방식이 오래가지 않았다. 가장 더운 시간에는 무리하게 돌아다니기보다 실내로 들어갔다. 에어컨이 나오는 카페, 쇼핑몰, 콘도 로비가 자연스럽게 쉼터가 됐다. 처음에는 그런 나 자신이 게으르게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나자 생각이 바뀌었다. 더위는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피해야 할 조건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하루의 흐름을 바꿨다. 아침에 움직이고, 한낮에는 쉬고, 해 질 무렵 다시 나갔다. 그 리듬이 반복되자 조급함이 줄어들었다. 카페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 대한 죄책감이 줄어들었다. 한국에서는 ‘생산적인 하루’가 중요했지만, 여기서는 ‘버티는 하루’가 더 중요했다. 더위 속에서 무리하지 않고, 내 몸 상태에 맞춰 움직이는 것. 그 단순한 변화가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나는 늘 빨리 결정하고 빨리 움직이는 사람이었는데, 여기서는 그 속도가 의미 없게 느껴졌다. 스콜이 내리면 30분을 그냥 기다려야 하고, 음식이 늦게 나와도 재촉할 수 없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나도 조금씩 느려졌다. 그리고 그 느림이 생각보다 편안하다는 걸 알게 됐다.

소비, 관계, 그리고 ‘충분함’에 대한 생각

한 달을 살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건 소비에 대한 감각이었다. 처음에는 “태국은 싸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느슨해졌다. 카페를 하루에 두 번 가도 부담이 덜했고, 택시를 타도 한국보다는 저렴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런데 일주일, 이주일이 지나자 누적된 금액이 눈에 들어왔다. 크게 비싼 걸 산 기억은 없는데도 지출은 생각보다 적지 않았다. 그때 깨달았다. 물가가 싸다고 해서 소비가 가벼워지는 건 아니라는 걸. 결국 중요한 건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였다. 로컬 식당에서 먹으면 충분히 합리적인 가격에 배부를 수 있고, 관광지의 레스토랑을 고르면 그만큼 비용이 오른다. 그 선택은 늘 내 몫이었다. 관계도 비슷했다. 깊은 대화를 나눈 건 아니지만, 반복적으로 마주친 사람들과의 짧은 교류가 기억에 남았다. 세탁소에서 손짓으로 도와주던 사람, 병원에서 천천히 설명해주던 직원, 매일 인사하던 경비원. 그 관계들은 강하지 않았지만, 반복되면서 분명해졌다. 한 달이 지나자 태국은 더 이상 ‘구경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이곳에도 출근하는 사람, 공부하는 학생, 하루를 버티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느껴졌다. 나 역시 그 흐름 안에 잠시 섞여 있었다. 돌아갈 날이 가까워질수록 화려한 관광지가 아니라, 평소에 걷던 길과 자주 가던 가게가 떠올랐다. 한 달은 긴 시간은 아니지만, 생각을 바꾸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더 많이 보는 여행보다, 덜 보더라도 오래 머무는 시간이 좋다는 걸 알게 됐다. 태국에서 한 달을 살며 얻은 가장 큰 변화는, 속도를 줄이고도 충분할 수 있다는 감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