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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서 처음 겪은 ‘스콜’과 날씨 적응기

by Koriland 2026. 2. 13.

맑은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던 순간

태국에 도착하고 며칠 안 됐을 때, 나는 아직도 ‘여행자 모드’에 가까웠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늘부터 올려다보고, 오늘은 어디를 갈지 대충 정하고, 더우면 카페에 들어가 쉬고, 그러다 또 걷고. 그날도 똑같았다. 하늘은 정말 맑았다. 구름이 거의 없었고 햇빛은 유리처럼 날카롭게 내리꽂혔다. 땀이 줄줄 흘러도 ‘동남아니까’ 하며 참고 다녔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공기가 이상하게 무거워졌다. 바람이 아예 멈춘 듯했고, 멀리서 천천히 먹구름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한국에서 보던 장마 전 분위기랑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속도는 비교가 안 됐다. 몇 분 사이에 하늘이 확 어두워졌고, 주변의 소리가 묘하게 작아졌다. 사람들도 뭔가를 알아챈 듯 걸음을 조금 빠르게 옮겼다. 그 다음은 정말 순식간이었다.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더니, 마치 누가 하늘을 찢어버린 것처럼 폭우가 쏟아졌다. 우산이 없어서 나는 근처 세븐이나 상점으로 뛰어 들어갔고, 바닥은 금세 작은 강처럼 변했다. 물이 도로 끝에서 끝으로 흘렀고, 오토바이들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내가 당황해서 휴대폰을 보호하려고 셔츠 안쪽으로 숨기고 있는 동안, 옆에 있던 현지 사람들은 생각보다 태연했다. 어떤 사람은 그냥 서서 비를 바라보고, 어떤 사람은 가게 앞 의자에 앉아 웃으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이상해서 더 멍해졌다. ‘이게 뭐지?’ 싶었는데, 더 신기한 건 비가 끝나는 방식이었다. 폭우는 한참 세게 내리다가 어느 순간 뚝— 하고 멈췄다. 진짜로, 누가 수도꼭지를 잠근 느낌이었다. 20~30분 전까지 앞이 안 보일 정도였는데, 갑자기 하늘이 다시 밝아지고 길 위에 남은 건 젖은 아스팔트와 뜨거운 김, 그리고 사람들의 평소 걸음뿐이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스콜’을 체감했고, 동시에 알게 됐다. 태국의 비는 “비가 온다”가 아니라 “비가 지나간다”에 가까운 거라는 걸.

더위는 단순한 온도가 아니었다

비가 지나가면 시원해질 줄 알았는데, 태국은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오히려 비가 내린 뒤가 더 힘든 날도 있었다. 습기가 확 올라오면서 공기가 끈적해지고, 피부에 붙는 느낌이 강해진다. 한국에서 “오늘 습해”라고 말하던 수준이 아니라, 숨을 들이마실 때 공기가 무게를 가진 것처럼 느껴졌다. 처음에는 ‘내가 약한가?’ 싶었다. 기온만 보면 그렇게 극단적으로 높지 않은 날도 있었는데, 체감은 완전히 달랐다. 땀이 식지 않고 계속 나는 느낌, 옷이 마르지 않는 느낌, 실내에서 밖으로 한 발짝 나가면 바로 안경이 뿌옇게 되는 느낌. 그러다 보니 하루 중 내가 움직이는 시간도 조금씩 바뀌었다. 한낮에 무리하게 걷는 걸 줄이게 됐고, 오전이나 해질 무렵에 중요한 일정을 몰아넣었다. 한낮에는 BTS나 쇼핑몰 같은 실내로 들어가 쉬는 시간이 늘었다. 처음엔 ‘내가 너무 카페만 다니나’ 싶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그게 생존 방식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현지 사람들을 보고 더 많이 배웠다. 그들은 얇은 옷을 입되 노출이 과하지 않았고, 모자나 양산을 자연스럽게 사용했다. 어떤 사람들은 반대로 얇은 긴팔을 입기도 했다. 햇빛을 직접 맞는 것보다, 몸을 가려서 열을 덜 받는 게 낫다는 걸 아는 듯했다. 나도 따라 해보니 확실히 낫더라. 물도 그냥 “목마를 때” 마시는 게 아니라, “목마르기 전에” 마시게 됐다. 작은 물병 하나로는 부족해서, 편의점 들를 때마다 하나씩 사서 들고 다니게 됐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 더위에 대한 감각이 달라진다. 여전히 덥긴 한데, 그 더위가 ‘불쾌한 공격’이라기보다 ‘이 나라의 기본 설정’처럼 받아들여진다. 신기하게도 마음이 그렇게 바뀌니까 몸도 조금 따라오는 느낌이 있었다. 똑같이 땀은 나는데, 예전처럼 짜증이 나지 않았다. ‘아, 지금은 그냥 더운 시간이지’ 하고 넘기게 된다. 태국의 날씨는 내 계획을 흔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내 성격을 조금 느슨하게 만들었다. 빨리빨리 하던 습관이 더위 앞에서는 별로 소용이 없었다.

날씨에 맞춰 변하는 하루의 리듬

스콜을 몇 번 겪고 나면 여행 방식 자체가 바뀐다. 예전에는 “오늘은 여기 가고, 저기 가고, 마지막에 저기” 이런 식으로 일정표를 깔끔하게 짜고 싶었는데, 태국에서는 그게 자주 무너진다. 비가 갑자기 쏟아지면 길이 잠깐 잠기기도 하고, 오토바이 이동이 애매해지기도 하고, 밖에서 할 예정이던 일이 미뤄진다. 처음에는 그게 스트레스였다.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현지에서는 그 시간을 ‘아깝다’고 느끼지 않는 분위기가 있다. 비가 오면 사람들은 일단 가까운 곳으로 모인다. 처마 밑, 카페, 편의점, 역 입구. 그리고 그냥 기다린다. 기다리면서 먹을 걸 사기도 하고, 대화를 하기도 하고, 휴대폰을 보기도 한다. 나도 어느 날은 비를 피하다가 편의점에서 아이스커피를 하나 사서 입구 근처에 서 있었는데, 사람들이 젖은 머리로도 웃으며 들어오고 나가는 게 이상하게 평화로워 보였다. 비가 그치면 모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움직인다. 나는 그 리듬을 따라가게 됐다. 가방에는 작은 우산이나 얇은 우비를 넣어두는 게 습관이 됐고, 샌들을 신을 때도 비 오는 상황을 생각하게 됐다. 일정도 ‘완벽하게’가 아니라 ‘대충 가능하게’로 잡게 됐다. 만약 비가 오면 실내로, 비가 그치면 다시 밖으로. 그렇게 하루가 흐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날씨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날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어떤 날은 갑자기 쏟아지는 비 덕분에 계획에 없던 카페에 들어가게 되고, 그 카페에서 오히려 좋은 기억이 남는다. 창가에 앉아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여행 중이라는 사실이 더 선명해진다. 반대로 너무 뜨거운 날에는 일정이 줄어들지만, 대신 천천히 움직이게 된다. 빨리 많이 보는 여행이 아니라, 덜 보더라도 제대로 느끼는 여행이 된다. 결국 태국에서의 날씨 적응은 ‘비를 피하는 법’만이 아니라, ‘내가 가진 속도를 조절하는 법’이었다. 스콜은 갑자기 와서 갑자기 가지만, 그 사이의 시간은 생각보다 풍부하다. 그걸 몇 번 경험하고 나니, 이제는 하늘이 어두워질 때 오히려 마음이 먼저 차분해진다. “아, 또 한 번 지나가겠네.” 그렇게 태국의 날씨는 내 여행을 흔들면서도, 동시에 내 여행을 더 태국답게 만들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