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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서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 다른 이유

by Koriland 2026. 2. 14.

‘빨리 끝내기 보다 지금 버티기에 가까운 하루

태국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같은 한 시간이 한국에서의 한 시간과 다르게 느껴질 때가 많다. 처음에는 그게 단순히 여행 기분 때문인 줄 알았다. 여행은 원래 시간이 느슨해지고, 일정도 마음대로 바뀌니까. 그런데 한 달 가까이 머물면서 깨달은 건, 여행자의 착각만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태국에서는 하루를 ‘빨리 처리해서 다음으로 넘어가는 방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버티고 지나가는 방식’으로 굴리는 느낌이 있다. 특히 더위가 그런 리듬을 만든다. 한낮에 밖에 나가서 무리하게 뭘 하려 하면, 몸이 먼저 거부한다. 숨이 턱 막히고 땀이 줄줄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 여기서 잠깐 쉬어야겠다”가 된다. 그러면 계획이 느슨해지고, 계획이 느슨해지면 시간의 감각도 달라진다. 한국에서는 ‘지금 이거 끝내고’가 기본인데, 태국에서는 ‘일단 잠깐 멈추고’가 자연스럽다. 멈추는 게 게으른 게 아니라 현실적인 선택이라는 걸 어느 순간부터 인정하게 된다. 나는 처음에 카페에 너무 자주 들어가는 내 모습이 좀 찜찜했다. “내가 이렇게 쉬기만 해도 되나?” 싶었다. 근데 태국에서는 다들 그렇게 산다. 오전에 잠깐 움직이고, 한낮에는 카페나 실내에서 쉬고, 저녁에 다시 나오는 흐름이 생활 자체에 박혀 있는 것 같다. 그걸 따라가다 보면 시간은 ‘남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것’이 된다. 게다가 스콜까지 겹치면 그 흐름은 더 확실해진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그냥 기다려야 한다. 어떤 날은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20분, 30분을 그냥 보낸다. 한국에서라면 “시간 아깝다”부터 나오겠지만, 이상하게 그곳에서는 그 시간이 아깝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들도 조급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짧은 정지가 하루의 일부처럼 스며든다. 그 순간 나는 이해했다. 태국에서 시간은 ‘관리해야 할 자원’이라기보다 ‘견디고 흘려보내는 흐름’에 가깝다는 걸. 그래서인지 태국에서 며칠만 지내도 내 말투부터 바뀐다. “빨리 가자”보다 “천천히 가자”가 많아지고, “지금 해야 돼”보다 “조금 있다가 하자”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이게 단순한 느림이 아니라, 환경과 생활이 만들어낸 리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쇼핑몰,콘도가 시간을 머물게 하는 장치가 된다

태국에서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 다른 이유를 생각하면, 결국 ‘머물 공간’의 차이가 크다. 한국에서는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이동도 빠르고, 일정도 촘촘하고, 공간은 대체로 효율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반면 태국에서는 시간을 붙잡아두는 공간이 눈에 띄게 많다. 카페가 대표적이다. 카페는 단순히 음료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시간을 눕혀두는 곳처럼 느껴진다. 시원한 에어컨, 적당히 낮은 음악, 오래 앉아도 눈치 주지 않는 분위기, 콘센트가 있는 자리, 넓은 테이블… 이런 요소들이 모이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머무는 사람’이 된다. 한국에서는 카페가 ‘중간 지점’인 경우가 많다. 약속 전 잠깐, 식사 후 잠깐, 이동 중 잠깐. 그런데 태국에서는 카페가 하루의 중심이 되기도 한다. 나도 그런 날이 있었다. 오전에 잠깐 나갔다가 더위를 피해서 카페로 들어갔는데, 한 시간만 있다가 나올 생각이 두 시간이 되고 세 시간이 됐다. 그 시간 동안 뭘 특별히 한 것도 아니다. 그냥 앉아서 창밖을 보고, 휴대폰을 보고,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근데 그게 이상하게 죄책감이 없었다. 주변을 보면 다들 비슷했다. 노트북으로 일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친구랑 속삭이듯 대화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도 있었다. ‘시간을 보내는 행위’가 목적이 되는 공간이 있다는 건, 생활 전체의 리듬을 바꾼다. 쇼핑몰도 마찬가지다. 태국 쇼핑몰은 단순히 물건을 사는 곳이 아니라, 더위를 피하고 식사하고 커피 마시고 영화도 보고, 하루를 통째로 보낼 수 있는 ‘거대한 실내 도시’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쇼핑몰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다. “쇼핑하러 간다”기보다 “거기 가면 시원하고 편하니까”라는 이유가 더 커 보인다. 콘도 생활도 시간 감각에 영향을 준다. 수영장과 헬스장 같은 시설이 건물 안에 있고, 로비가 넓고 관리가 잘 되어 있으면 굳이 멀리 나가지 않아도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퇴근 후에 헬스장 잠깐 들렀다가 수영장 옆에 앉아 바람을 맞고 올라오는 식이다. 이런 구조는 시간을 ‘활동’으로 채우기보다 ‘공간’으로 채우게 만든다. 한국에서는 시간을 채우려면 보통 뭔가를 해야 한다. 일을 하든, 약속을 잡든, 목적을 만들든. 그런데 태국에서는 공간이 시간을 채워준다. 그냥 거기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지나간다. 그리고 그게 자연스럽다. 그래서 나는 태국에서 “오늘 뭐 했어?”라는 질문이 조금 다르게 들린다. 한국에서라면 ‘무엇을 성취했는지’가 중요하지만, 태국에서는 ‘어디에서 어떻게 보냈는지’가 더 중요한 느낌이다. 그 차이가 시간의 속도를 결정하는 것 같다.

사람 사이의 거리, "괜찮아"라는 분위기가 시간을 늘린다

마지막으로 태국에서 시간을 다르게 보내는 이유를 생각하면, 결국 사람들의 태도와 관계 방식이 크다. 태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마이펜라이”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듣게 된다. 단어 뜻만 보면 “괜찮아” 정도로 번역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더 넓은 감정이 들어 있다. 조금 늦어도 괜찮고, 조금 틀려도 괜찮고, 조금 불완전해도 괜찮다는 분위기. 그 분위기는 사람 사이의 속도를 늦춘다. 예를 들어 약속 시간. 한국에서는 5분만 늦어도 미안함이 크게 느껴지고, 늦는 이유를 설명해야 하고, 상대도 시간을 빡빡하게 쓰기 때문에 마음이 급해진다. 그런데 태국에서는 물론 늦는 게 항상 괜찮다는 뜻은 아니지만, 체감상 ‘늦음’에 대한 긴장감이 덜하다. 도로가 막히거나 비가 갑자기 쏟아지면 늦을 수 있다는 걸 다들 전제로 깔고 사는 느낌이다. 그러니 시간을 딱 맞춰서 통제하려는 압박이 줄어든다. 압박이 줄면 마음이 느슨해지고, 마음이 느슨해지면 하루가 길어진다. 또 서비스나 응대에서도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음식이 조금 늦게 나오는 날이 있어도, 사람들은 크게 화내지 않는다. 직원도 서두르지 않는다. 처음에는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 나도 처음엔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그게 ‘느린 서비스’가 아니라 ‘다른 리듬’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 리듬 속에서는 내가 서두르는 게 오히려 이상해진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도 천천히 기다린다. 그 기다림이 쌓이면 시간 감각이 바뀐다. 게다가 태국의 친절은 종종 “말로 설명하기”보다 “그냥 도와주기”로 나타난다. 길을 못 찾고 있으면 같이 걸어주고, 동전이 부족해 보이면 옆 사람이 바꿔주고, 비를 피하려고 멈춰 서 있으면 처마 밑 자리를 내어준다. 이럴 때 대화는 길지 않다. 하지만 그 짧은 상호작용이 하루의 결을 부드럽게 만든다. 부드러운 하루는 급하지 않다. 급하지 않은 하루는 길다. 그리고 태국에서는 혼자 있어도 혼자 같지 않은 순간이 자주 있다. 카페에서 혼자 앉아 있어도 어색하지 않고, 시장에서 혼자 서 있어도 부담이 덜하다. 한국에서는 혼자 있는 시간이 때로 ‘비어 있는 시간’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만, 태국에서는 혼자 있는 시간도 ‘그냥 있는 시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 차이가 엄청 크다. 비어 있는 시간은 불안하지만, 그냥 있는 시간은 편하다. 편한 시간은 길게 느껴진다. 한 달 동안 태국에 머물면서 내가 달라진 건, 결국 시간을 쓰는 방식이었다. “오늘 뭘 했지?”보다 “오늘 어떤 공기 속에 있었지?”를 먼저 떠올리게 됐다. 나를 조급하게 만들던 기준들이 조금씩 느슨해졌고, 그 느슨함이 태국의 리듬에 맞춰지는 과정이 됐다. 그래서 태국에서의 하루는 늘 조금 더 길고, 조금 더 부드럽게 기억된다. 시간은 똑같이 흐르는데, 사람들이 시간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차이는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