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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서 ‘기다림’이라는 개념

by Koriland 2026. 2. 14.

태국에서 기다림은 멈춤이 아니라 흐름에 가깝다

태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는 기다림을 불편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기다린다는 건 뭔가가 늦어지고 있다는 뜻이고, 내 계획이 밀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한국에서의 일상은 빠르게 굴러간다. 약속 시간은 정확해야 하고, 음식은 빨리 나와야 하고, 대기 줄은 짧을수록 좋다. 기다림은 대부분 줄이고 싶은 대상이다. 그런데 태국에서는 그 개념이 미묘하게 달라진다. 첫 번째로 크게 느낀 건 음식점에서였다. 로컬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하면, 음식이 바로 나오지 않는다. 주방에서 천천히 조리하는 소리가 들리고, 옆 테이블에서는 사람들이 조용히 대화를 이어간다. 처음에는 손목시계를 보며 언제 나오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초조해 보이지 않았다. 직원도 재촉받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마치 그 기다림 자체가 식사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음식이 나오기까지의 시간 동안 사람들은 그냥 앉아 있다. 휴대폰을 보기도 하고, 창밖을 보기도 하고,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어간다. 그 장면이 반복되면서 내 마음의 속도도 조금씩 느려졌다. 기다림이 더 이상 낭비되는 시간이 아니라, 비어 있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비어 있다는 건 불안한 게 아니라, 아직 무엇이든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라는 뜻이 된다. 태국에서는 기다림이 단절이 아니라 연속처럼 이어진다. 스콜이 갑자기 쏟아져도 사람들은 처마 밑에서 자연스럽게 멈춘다. 교통이 막혀도 기사와 승객이 함께 도로를 바라본다. 그 기다림은 짜증으로 폭발하기보다, 공기의 일부처럼 스며든다. 나는 처음엔 그 리듬이 답답했지만, 점점 이해하게 됐다. 이곳에서 기다림은 실패가 아니라 정상이라는 걸.

줄 서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태도의 차이

태국에서 기다림을 가장 선명하게 느낀 곳은 편의점과 길거리 노점이었다. 특히 퇴근 시간대 편의점 계산대 앞 줄은 꽤 길어지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줄이 길어지면 계산대 뒤 직원의 손이 더 빨라지고, 손님도 자연스럽게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누군가 계산이 조금만 늦어도 뒤에서 미묘한 한숨이 나온다. 그런데 태국에서는 줄이 길어져도 분위기가 크게 바뀌지 않는다. 사람들이 휴대폰을 보며 서 있고, 누군가는 가볍게 대화를 나눈다. 계산대 직원도 속도를 유지하지만, 급하게 몰아붙이는 기색은 덜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한 번 내 자신을 돌아봤다. 나는 줄이 길어지면 무의식적으로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을 번갈아 옮기고, 손목시계를 보고, 속으로 계산을 한다. 그런데 주변이 느긋하면 나 혼자 긴장하는 게 어색해진다. 자연스럽게 나도 휴대폰을 꺼내 들거나, 그냥 멍하니 서 있게 된다. 시장에서도 비슷했다. 인기 있는 가게 앞에서는 주문이 밀린다. 하지만 손님은 화내지 않고 기다린다. 상인은 천천히 재료를 준비하고, 중간중간 손님에게 웃으며 말을 건넨다. 기다림이 대치 상태가 아니라 상호작용이 된다. 그 장면이 이상하게 인상 깊었다. 기다리는 사람과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 서로를 적으로 보지 않는다. 둘 다 그 시간을 공유하는 입장처럼 느껴진다. 한국에서는 기다림이 종종 서비스가 늦는 상황으로 정의된다면, 태국에서는 지금은 이런 시간으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모든 상황이 항상 부드러운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장면들 속에서 기다림은 날카롭지 않았다. 나는 그 차이를 몸으로 느끼면서 조금씩 변했다. 줄이 길어도 덜 초조해졌고, 음식이 늦게 나와도 화가 덜 났다. 기다림이 스트레스의 원인이 아니라, 하루를 구성하는 한 조각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기다림 속에서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시간

태국에서 한 달을 보내며 가장 크게 달라진 건, 기다림을 견디는 나 자신의 태도였다. 한국에서는 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이동 중에도 휴대폰을 확인하고, 짧은 시간이라도 생산적으로 써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태국에서는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기다림이 많다. 음식이 나오기 전, 비가 그치기 전, 친구가 도착하기 전, 병원 순서가 돌아오기 전. 처음에는 그 시간들을 채우기 위해 휴대폰을 붙들었다. 하지만 어느 날은 배터리가 거의 없어서 그냥 앉아 있어야 했다. 그때 비로소 주변 소리가 들렸다.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 빗방울이 지붕을 때리는 소리, 멀리서 오토바이가 지나가는 소리. 그 소리들 사이에 내가 있었다.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선명하게 지금을 느끼는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기다림을 줄이기 위해 시스템을 정교하게 만든다. 예약, 번호표, 빠른 처리. 그건 효율적이고 필요하다. 하지만 태국에서는 완벽하게 통제되지 않는 시간이 더 많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시간은 사람을 잠시 멈추게 한다. 멈추면 생각이 따라온다. 나는 왜 이렇게 급했을까, 왜 몇 분이 이렇게 길게 느껴졌을까. 기다림은 나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태국에서의 기다림은 나를 바꾸는 장치였다. 예전보다 덜 조급해졌고, 조금은 더 여유가 생겼다.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기다림이 두렵지는 않게 됐다. 태국에서 기다림은 시간을 잃는 게 아니라, 시간을 다르게 쓰는 방식이었다. 그 차이를 몸으로 느낀 한 달은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