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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먹어본 쏨땀, 매운맛의 충격

by Koriland 2025. 8. 22.

태국에서 마주한 낯선 샐러드, 초록 파파야의 첫인상

 태국에 오기 전까지 샐러드는 대체로 잎채소에 드레싱을 얹는 음식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현지 친구가 “오늘은 쏨땀을 먹어보라”고 권했을 때, 눈앞에 나타난 접시는 그 상식을 완전히 뒤집었다. 가늘게 채 썬 초록 파파야가 산처럼 수북했고, 잘게 갈라 넣은 방울토마토가 붉은 점처럼 빛났다. 쪼갠 라임이 가장자리에 얹혀 있었고, 볶은 땅콩과 말린 새우가 고명처럼 흩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강렬했던 건 잘게 다져진 생고추였다. 보기만 해도 혀끝이 얼얼해지는 색이었다. 주방에서는 절구와 막대가 ‘둥, 딱, 둥’ 리듬을 만들며 쉬지 않고 부딪혔다. 이 리듬 속에서 라임즙, 설탕, 피시소스, 고추, 마늘이 한 덩어리의 소스로 엮여 갔다. ‘쏨’은 ‘시다’는 뜻, ‘땀’은 ‘찧는다’는 뜻이라는 설명을 듣자 요리의 성격이 더 선명해졌다. 재료를 썰어 그릇에 담는 대신 절구에서 두드려 맛을 스며들게 한다는 개념이 흥미로웠다. 업힌 향이 아니라 박힌 맛, 표면에 발라지는 것이 아니라 섬유질 속으로 파고드는 맛이었다. 접시를 앞에 두고 포크를 들었지만 손끝이 잠깐 멈췄다. 냄새부터 낯설었다. 라임의 산미, 피시소스의 짭조름함, 생고추의 알싸함이 동시에 올라왔다. 익숙하지 않은 조합인데도 이상하게 식욕을 자극했다. 여행지에서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으면 무엇을 하겠나 싶어 결국 한 움큼 집어 올렸다. 초록 파파야의 결이 포크 사이로 탱탱하게 부서졌고, 입에 넣는 순간 아삭, 하는 소리가 귓속에서 울렸다. 그 한입이 이 음식과의 긴 인연을 여는 시작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불처럼 번진 매운맛과 식탁 위 작은 문화수업

 첫 한입은 상큼했다. 라임과 설탕, 피시소스가 만드는 ‘단짠새콤’의 삼박자가 먼저 혀를 스쳤다. 곧이어 생고추의 기세가 밀려왔다. 뒤통수부터 목울대까지 화끈하게 열이 퍼졌고, 몸은 반사적으로 물을 찾았다. 물을 벌컥 들이켰지만 매운 결은 오히려 더 날카로워졌다. 옆자리에서 지켜보던 친구가 코코넛 주스를 건넸다. 달고 미끈한 과즙이 매운맛의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냈다. 다시 접시로 돌아가 두 번째 한입을 넣자 이번에는 파파야의 아삭함이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절구에서 가볍게 찧어낸 덕분인지 채가 단단하면서도 소스가 속까지 배어 있었다. 말린 새우의 감칠맛, 땅콩의 고소함, 토마토의 은근한 단맛이 번갈아가며 올라왔다. 매워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계속 먹고 싶은 마음이 교차했다. 식탁에서는 작은 문화수업이 시작됐다. 지역마다 쏨땀의 개성이 다르고, 발효액젓이나 게를 넣는 버전도 있으며, 매운 정도를 숫자로 주문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절구를 두드리는 강약은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식감과 향을 조절하는 기술이라는 설명도 흥미로웠다. 세게 찧으면 파파야가 물러지고, 가볍게 두드리면 아삭함이 살아난다는 것이다. 친구는 내 접시에 라임을 하나 더 짜 넣고, 설탕을 핀치로 얹어 균형을 맞춰 줬다. 그 작은 조정 후 맛의 실루엣이 확 달라졌다. 산미가 한 뼘 앞으로 나와 매운맛을 리드했고, 짠맛은 뒤에서 받쳐 주었다. 순간 ‘이건 매운 요리가 아니라 균형의 요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안은 뜨거웠지만 머릿속은 이상하게 맑아졌다. 나는 땀을 닦으며 서서히 포크질의 리듬을 배웠다. 크게 한 움큼, 잠깐 숨 고르기, 라임 한 번, 그리고 다시 한 움큼. 매운맛은 줄기가 되어 식탁 위의 대화를 엮었다. 매운 정도를 묻고, 집에서는 어떻게 만드는지, 어느 시장이 유명한지, 누가 가장 절구를 잘 다루는지,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음식은 배를 채웠고, 설명은 마음을 채웠다. 이쯤 되자 나는 ‘오늘 처음 만난 요리’가 아니라 ‘오래 알던 친구의 별명’을 듣는 기분이 들었다.

한 접시가 남긴 기억, 다시 쏨땀을 찾게 되는 이유

 접시가 비어 갈수록 매운 여운은 낮아졌고, 대신 기억의 밀도가 높아졌다. 숨을 들이쉴 때 라임껍질의 기름기가 미세하게 코끝을 스쳤고, 씹을 때마다 파파야 섬유가 사각사각 그 소리를 품어냈다. 음식은 혀에서 끝나지 않았다. 손목에 닿은 절구의 진동, 눈앞에서 튀던 라임즙의 반짝임, 주변 테이블의 웃음소리가 겹치며 장면을 만든다. 나는 그 장면을 마음속에 저장했다. 며칠 뒤 다른 가게에서 다시 쏨땀을 시켰을 때, 자연스럽게 매운 정도를 이야기하고 라임 추가를 부탁하는 나를 발견했다. 같은 요리라도 절구의 박자, 고추의 종, 설탕의 한 꼬집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매운맛은 여전히 강렬하지만, 강렬함을 붙잡아 둘 틈새를 내가 스스로 만든다. 때로는 끈적한 더위와 맞서는 데 이만한 요리가 없고, 때로는 길게 늘어진 오후의 나른함을 깨우는 데도 이만한 자극이 없다. 무엇보다 소박한 한 접시가 낯선 도시에서 말을 건네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천천히, 크게 한입, 그리고 웃으면서.” 그 리듬을 따라 먹다 보면, 이곳 사람들의 생활 속 박자를 닮아 간다. 빠르게 삼키지 않고, 균형을 조정하며, 함께 나누는 박자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그날의 손동작이 자주 떠오른다. 라임을 짜고, 절구를 두드리고, 소스를 맛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표정. 매운맛은 사라지지만 기억은 숙성된다. 그래서 다시 태국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화려한 사원이 아니라 이 한 접시다. 길모퉁이의 작은 가게, 주인장의 구릿빛 팔, 절구의 묵직한 울림, 그리고 땀을 훔치며 웃던 내 얼굴. 나는 안다. 또다시 방콕에 간다면, 가장 먼저 찾을 장소가 어디인지. 메뉴판을 펼치기 전에 이미 대화는 시작될 것이다. “쏨땀, 매운맛은 보통보다 약간 덜, 라임은 조금 더, 그리고 함께 나눌 접시를 하나.” 그렇게 주문하는 순간, 나의 여행도 다시 첫 장을 넘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