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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속 사거리의 붉은 신호등이 나에게 알려준 것

by Koriland 2026. 2. 2.

도심 한복판에서 갇혀버린 나의 시간과 타들어가는 속마음

태국의 4월은 잔인할 정도로 뜨겁다. 가만히 서 있어도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흐르는 이 계절에, 나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평소라면 당연히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BTS(지상철)나 MRT(지하철)를 탔겠지만, 그날따라 짐이 많다는 핑계로, 그리고 약속 시간에 늦었다는 조급함 때문에 덜컥 '툭툭(Tuk-tuk)'을 잡아탔다. 목적지는 방콕에서 가장 교통이 혼잡하기로 악명 높은 스쿰빗 아속(Asoke) 사거리 근처였다. 기사는 자신만만하게 "Shortcut(지름길)!"을 외치며 골목 사이사이를 누볐지만, 결국 거대한 도로의 정체 속에 우리를 밀어 넣었다. 오후 6시, 방콕의 퇴근 시간은 지옥 그 자체였다. 도로는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해 있었고, 수백 대의 차량이 뿜어내는 매연과 열기가 아스팔트 위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툭툭은 사방이 뚫려 있어 그 매연과 소음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10분이 지나도, 20분이 지나도 신호는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툭툭은 1미터도 전진하지 못했다. 약속 시간은 이미 지났고, 핸드폰 배터리는 간당간당했다. 내 속은 타들어 갔다.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본능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멍하니 서 있는 앞차의 뒤꽁무니를 보며 나는 속으로 온갖 욕을 씹어 삼켰다. "대체 신호 체계가 어떻게 되어먹은 거야?", "이럴 거면 걷는 게 낫지 않았을까?" 내 머릿속은 온통 후회와 짜증, 그리고 늦었다는 불안감으로 가득 차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뜨거운 태양보다 더 뜨거운 화가 내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멈춰진 도로 위에서 마주한 기사님의 콧노래와 망고밥

그렇게 30분 같은 300초가 흘렀을까, 나는 무심코 운전석에 앉은 툭툭 기사님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아야 할 사람은 사실 내가 아니라 그여야 했다. 손님을 빨리 내려주고 다음 손님을 태워야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시동을 끄고 아주 태평하게 핸들에 발을 올린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주섬주섬 운전석 옆에 걸어둔 비닐봉지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시장에서 산 듯한 찰밥(카오냐오)과 돼지고기 꼬치(무삥)였다. 그는 꽉 막힌 도로가 마치 자신의 안방인 양, 아주 느긋하고 맛있게 꼬치를 뜯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어서 나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때, 백미러로 나와 눈이 마주친 기사님이 웃으며 나에게 알 수 없는 태국어로 말을 걸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봉지에서 남은 꼬치 하나를 나에게 권하는 시늉을 했다. "긴 마이 캅? (먹을래요?)" 아마도 그런 뜻이었으리라. 나는 손사래를 쳤지만,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이 답답한 상황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즐기고' 있었다. 꽉 막힌 도로를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처럼 받아들이고, 그 틈을 타서 자신의 끼니를 해결하는 여유. 그의 낡은 툭툭 운전석 앞에는 가족사진으로 보이는 빛바랜 사진 한 장과 꽃장식이 흔들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게으르다고 말할지 모를 그 태평함 속에서, 나는 묘한 삶의 내공을 느꼈다. 내 조급함이 도로를 뚫을 수 없듯이, 그의 여유가 도로를 막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도로는 막혀 있었고, 우리는 그 위에 존재할 뿐이었다.

'짜이 옌옌', 뜨거운 도시가 내게 건네는 차가운 위로

기사님의 권유에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마이 뺀 라이(괜찮아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짜이 옌옌(Jai Yen Yen)"이라고 말하며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했다. 태국어를 배우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직역하면 '차가운 마음' 즉, '진정해라, 서두르지 마라'는 뜻이다. 그 한마디가 매연 가득한 도로 위에서 마법처럼 내 화를 식혀주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화를 낸다고 해서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한국에서 나는 늘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며 살았다.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남보다 뒤처지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 방콕의 도로 위에서는 그 모든 속도 경쟁이 무의미했다. 1시간 뒤, 도로는 거짓말처럼 뚫렸고 툭툭은 다시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나는 약속에 늦었지만 친구들은 화를 내지 않았다. "방콕 트래픽은 어쩔 수 없지"라며 웃어넘겼다. 나는 툭툭에서 내리며 기사님에게 팁을 조금 더 챙겨주었다. 그는 합장하며 "컵쿤 캅"이라고 인사했고, 다시 유유히 매연 속으로 사라졌다.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툭툭 안에서 찍은 흔들린 사진 한 장을 보았다. 붉게 빛나는 수천 개의 자동차 미등이 마치 강물처럼 흐르는 사진이었다. 징그럽게만 보였던 그 붉은 불빛들이 이제는 도시의 혈관처럼 아름답게 느껴졌다. 우리는 어쩌면 인생이라는 긴 도로 위에서, 가끔은 시동을 끄고 돼지고기 꼬치 하나를 먹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상황 앞에서 분노하기보다는, 차라리 그 순간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그 툭툭 기사님처럼 말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방콕에서 길이 막히면 하늘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다. 어차피 갈 길은 가게 되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