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습기 속으로 들어서다, 라농 온천의 첫 숨
비가 잦기로 유명한 라농에 도착하자 공기는 이미 미세한 수증기로 가득했다. 버스에서 내려 짐을 추스르고 온천 공원으로 들어가니, 나지막한 산허리를 타고 내려온 온기가 비 냄새와 섞여 뿜어져 나왔다. 돌탕 가장자리에는 나무국자와 양동이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현지인들은 먼저 손등을 적신 뒤 발목을 천천히 담갔다. 뜨겁고, 곧 따뜻해지고, 이내 편안해지는 세 단계가 규칙처럼 이어졌다. 비는 그치지 않았지만, 온천수 위로 맺힌 작은 방울들이 톡톡 튀며 금세 사라졌다. 나는 발을 담그고 허리를 세웠다. 열이 피부를 한 겹 벗기듯 스며들자 장거리 이동으로 굳어 있던 종아리가 풀리고, 머릿속의 속도도 함께 늦춰졌다. 근처에서는 은박 포일에 감싼 달걀이 작은 바구니째 뜨거운 물가에 놓여 있었고, 아이는 달걀이 익어 가는 걸 초시계처럼 지켜보다가 껍질을 탁 깨고 소금을 살짝 뿌렸다. 온천의 규칙은 단순했다. 먼저 기다리고, 천천히 익히고, 조금씩 나눠 먹는다. 비를 피해 온 벤치에서는 노인이 우비를 턱받이처럼 걸치고 따끈한 생강차를 나눠 주었다. 나는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김을 들이마셨다. 생강의 매운 향이 코를 타고 오르는 순간, 하루의 첫 장이 선명하게 넘겨졌다. 옆자리 아주머니는 “뜨거우면 잠깐 빼요”라고 손짓했고, 나는 발을 빼어 젖은 돌 위에 올려 식혔다가 다시 담갔다. 온천수와 비가 번갈아 피부를 만지는 이 리듬이 라농의 호흡 같았다. 탕을 벗어나 발을 말릴 때쯤, 나는 알았다. 이 도시에서는 먼저 땀을 빼고, 그다음 할 일을 정한다는 것을. 순서가 바뀌면 하루가 어색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가 와도, 일정이 조금 늦어져도, 먼저 온기를 챙긴다. 그 온기가 국경의 간극을 메우고, 낯선 이의 표정을 풀어 주기 때문이다.
비 내리는 숲과 맹그로브 보드워크, 물의 도시가 들려준 박자
온천에서 몸이 풀리자 나는 비옷의 지퍼를 끌어 올리고 숲길로 향했다. 라농의 숲은 빗소리에 맞춰 목소리를 바꾼다. 굵은 잎을 때리는 물방울 소리가 드럼처럼 규칙을 만들고, 이끼 낀 나무줄기에서는 물내음이 짙어졌다 흐려졌다를 반복한다. 보드워크가 시작되자 뿌리가 드러난 맹그로브들이 사족을 뻗은 동물처럼 낮게 엎드려 있었다. 진흙 밭에서는 집게를 흔드는 작은 게가 옆걸음질을 치고, 미끌미끌한 망둥어가 물 위로 얼굴을 내밀어 눈을 깜빡였다. 발 아래로 빠르게 지나가는 물살은 바다와 강이 합의해 만든 타협안 같았다. 우산 끝에서 떨어진 방울이 진흙에 툭 박히면 동그란 물결이 퍼져 서로의 경계를 부드럽게 지웠다. 잠시 비가 잦아드는 틈에 하늘이 잠깐 밝아졌다가 곧 다시 스콜처럼 세차게 쏟아졌다. 나는 난간에 팔꿈치를 얹고 깊은 숨을 들이켰다. 짠내와 흙내, 젖은 나무의 단내가 순서 없이 훅훅 들어왔다. 보드워크 끝자락에서 국경 너머 미얀마 쪽 강기슭이 흐릿하게 보였고, 얕은 물 위를 미끄러지듯 가는 작은 배가 비의 커튼 속으로 사라졌다. 라농은 지도로 보면 선 하나로 갈라져 있지만, 숲과 물에서는 분리의 명확함이 희미해진다. 경계는 소리와 냄새, 흐름으로 다시 그려진다. 빗줄기가 강해지자 숲은 말을 아꼈다. 그러나 완전히 침묵하지는 않았다. 낮게, 멀리, 귓바퀴를 스치는 음으로만 이어졌다. 나는 발걸음을 늦추고 물고인 판재를 피해 한 칸씩 옮겼다. 신발 바닥이 미끄러지면 난간의 축축한 나무 결이 손바닥을 붙잡았다. 이 도시의 숲은 속도를 낮추는 장치들로 가득했다. 너무 천천히 걷는다고 꾸짖지 않고, 너무 빨리 달린다고 환호하지도 않는다. 그저 바람과 물, 뿌리와 진흙의 호흡에 사람을 맞춘다. 어느새 내 우비는 비에 젖어 묵직해졌고, 마음은 그 반대로 가벼워졌다. 빗방울마다 할 일을 덜어 내듯 걷다 보니, 내가 챙길 것은 생각보다 적고, 잃을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또렷해졌다.
국경 도시에서 배운 쉼, ‘하지 않음’의 용기를 익히다
비가 뜸해지자 강가의 찻집으로 들어갔다. 주인은 젖은 우비를 걸 데가 없다며 의자를 하나 더 빼 주고, 주전자를 아궁이에 더 가까이 붙였다. 진한 차가 잔에 반쯤 차오르자 향이 먼저 도착했다. 달지 않은 차에 연유를 한 숟갈 섞어 마시니 비로소 몸의 온도와 마음의 속도가 같은 박자를 탔다. 창밖에서는 고무장화를 신은 상인이 버팀목을 세우고, 아이는 빗물 웅덩이에 배 모양의 잎을 띄웠다. 라농의 오후는 그렇게 ‘하는 일’보다 ‘멈추는 일’로 채워졌다. 버스 시간까지 한참이 남았지만, 나는 일부러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쩌면 쉼은 시간을 비우는 게 아니라 자리를 지키는 일인지도 모른다. 국경의 도시에서 배운 건 이동의 요령이 아니라 멈춤의 자세였다. 떠나고 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 자리를 만들어 두는 법. 나는 온천에서 데워진 발을 기억하고, 숲에서 느린 보폭을 떠올리며,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봤다. 주인이 접시에 작은 참깨 과자를 올려 놓으며 “비 오면 더 달아요”라고 말했다. 정말 그랬다. 비가 오면 단맛은 더 단단하고, 짠맛은 더 부드러워졌다. 창틀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촘촘하게 이어지자, 나는 배낭의 수첩을 꺼내 오늘의 문장을 적었다. ‘먼저 데우고, 천천히 걷고,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여행지에서 누군가는 더 많이 보고 더 멀리 가려 애쓴다. 하지만 라농에서는 덜 보기로, 덜 가기로, 덜 말하기로 결정하는 일이 더 큰 용기였다. 버스 시간에 맞춰 찻집 문을 나설 때, 주인은 우비의 모서리를 한 번 더 털어 주고, 바깥의 흙탕물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이쪽이 덜 미끄러워요”라고 알려 주었다. 나는 발을 조심스레 옮기며 고개를 숙였다. 숲으로부터 배운 느림, 온천으로부터 배운 온기, 비로부터 배운 여백이 발끝에 모였다. 차창에 맺힌 물방울이 뒤로 달아나며 궤적을 남겼다. 그 궤적은 오늘 내가 배운 쉼의 문장과 닮아 있었다. 끝이 뾰족하지 않고, 선명하지도 않지만,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는 선. 다음에 다시 라농을 찾는다면, 나는 먼저 발을 데우고, 비 예보를 확인한 뒤, 일부러 아무 약속도 잡지 않을 것이다. 그 비어 있는 칸이 이 도시와 나를 천천히 연결해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