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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콘시탐마랏의 남탈렁(그림자극)과 왕사원, 전통이 숨 쉬는 밤

by Koriland 2025. 8. 25.

해 질 녘 왕사원에서 만난 오래된 숨

 나콘시탐마랏에 도착한 저녁, 도시는 비를 머금은 남쪽 바람으로 천천히 식어 가고 있었다. 숙소에 짐을 놓자마자 나는 ‘왕사원’이라 불리는 도심의 큰 사원으로 향했다. 골목을 돌 때마다 희미한 종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와 방향을 알려 주었다. 흰 옷을 입은 신도들이 향을 들고 경내로 들어갈 때, 하늘빛을 머금은 흰 첨탑이 담장 너머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사원 앞 노점에서는 재스민 꽃목걸이와 작은 오일 램프가 엷은 향을 뿜었고, 아이들은 맨발로 비에 젖은 돌바닥을 조심스럽게 건넜다. 나는 합장을 올린 뒤, 스님의 안내를 따라 탑을 시계 방향으로 천천히 돌았다. 석양이 기울수록 첨탑의 흰빛은 은은한 회백으로 바뀌었고, 금빛 장식은 짧게 번쩍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경내 한켠에서는 목어를 두드리는 소리와 낮게 읊조리는 염불이 교차했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참배객들의 발걸음이 아주 규칙적인 박자를 만들었다. 기념품 가판대의 노인은 고운 모래를 한 줌 떠서 내 손바닥에 올려 주며, ‘돌아가는 길에 강가에 뿌리면 마음이 가벼워진다’고 말했다. 내게 사원은 ‘구경하는 장소’였지만, 이들에게 사원은 ‘하루를 정리하는 방’이라는 사실이 선명해졌다. 흰 담장 아래 작은 제단에는 비에 젖은 사롱이 말려 있었고, 유리 진열장에는 오래된 경전과 실핏줄 같은 금박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나는 잠시 벤치에 앉아 첨탑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구름 뒤로 달이 올라오자, 첨탑의 희미한 그림자가 바닥에 길게 드리워졌다. 그 순간, 도시 전체가 이 사원이 뿜어내는 호흡에 맞춰 잠깐 멈춘 듯했다. 여기서는 ‘조용히 서 있는 일’이 곧 참여였다. 발뒤꿈치를 들었다 놓는 작은 동작에도 공기가 달라졌다. 나콘시탐마랏의 첫 밤은 그렇게 사원의 숨과 한 호흡이 되는 연습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꽃목걸이를 탑 아래 작은 그릇에 올려두고, 촛불 하나를 밝혀 두 손을 데웠다. 빛은 빨리 타오르지 않았고, 대신 오래 머물렀다. 오래 머문다는 것, 이곳 사람들이 전통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남탈렁(그림자극)의 흰 막 뒤에서, 웃음과 즉흥이 만드는 밤

 사원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에 흰 천막이 세워지고, 그 뒤편으로 노란 전구가 한 줄 켜졌다. 오늘 밤의 주인공은 남부 전통 그림자극인 남탈렁이었다. 흰 스크린 앞으로 의자가 늘어서고, 아이들은 앞줄로 달려가 자리를 맡았다. 뿌연 빛이 천을 통과하자, 얇은 소가죽에 정교한 구멍을 낸 인물들의 실루엣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긴 대나무 막대 두 개가 팔과 몸통을 움직이는 축이 되었고, 한 사람의 광대가 여러 목소리로 장면을 바꾸어 가며 이야기를 이끌었다. 남쪽 특유의 빠른 억양과 유머가 골목 소음을 가볍게 덮었다. 어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근래의 동네 소식을 우스개로 비튼 대사를 반갑게 받았고, 아이들은 장난기 많은 조연이 등장할 때마다 배를 잡고 웃었다. 북과 작은 징, 플루트가 번갈아 리듬을 잡았고, 악사의 손은 대사 사이사이에 숨을 쉬듯 건반을 눌렀다. 한 장면에서는 고을의 장터가 열려 흥정이 벌어졌고, 다음 장면에서는 악동이 예법을 어기다 혼쭐이 났다. 그러나 꾸짖음도 웃음으로 마무리되는 법, 주인공은 결국 사과의 절을 하고 모두가 박수를 쳤다. 갑작스러운 바람이 불어 천이 흔들릴 때, 뒤편의 광대는 즉흥으로 천을 잡는 인물의 손짓을 연기해 관객을 또 한 번 웃게 했다. 전통은 박물관 유리너머의 유물이 아니라, 바람까지 끌어들여 새로 반죽되는 ‘살아 있는 것’이었다. 막간에는 수제 레몬그라스 차와 달지 않은 찹쌀 디저트가 돌았고, 옆자리 할아버지는 옛날에는 등잔 불빛으로 그림자를 만들었다며, 전구가 밝아져도 이야기가 더 멀리 간 적은 없다고 말했다. ‘멀리 가는 건 빛이 아니라 이야기’라는 그의 말이 귀에 오래 남았다. 무대 옆에는 장인의 작업대가 놓여 있었고, 얇게 무두질된 소가죽에 칼자국이 별자리처럼 박혀 있었다. 장인은 내 손등에 끼운 채로 작은 새 모양의 꼭지 인형을 흔들어 보게 했다. 흰 막에 비친 그림은 미세한 손놀림에도 금세 다른 표정을 가졌다. 관객이 움직이면 전통도 함께 움직인다. 공연의 마지막, 흰 천에 새벽빛 같은 푸른 조명이 스며들고, 반달 모양의 조각이 떠오르며 장면이 닫혔다. 박수 소리가 발밑의 흙을 가볍게 떨었다. 나는 웃으면서도 이상하게 목이 뜨거웠다. 사람과 시간, 언어와 농담이 한 막의 안쪽에서 서로를 살려 주고 있었다.

왕사원의 새벽 종과 장인의 칼끝, 전통이 내게 남긴 약속

 밤이 깊자 사람들은 흩어졌고, 나는 무대 뒤쪽으로 돌아가 장인의 손을 다시 보았다. 작은 송곳과 여러 굵기의 칼, 커터가 질서 있게 놓인 작업대 위로 전구 한 개가 낮게 매달려 있었다. 장인은 소가죽을 물로 적신 뒤, 꽃과 구름, 신화 속 동물의 무늬를 찍어내듯 천천히 파냈다. 칼끝은 날카로웠지만, 손목의 회전은 희한할 만큼 느렸다. 느림이 정교함을 낳고, 정교함이 오래 감상되는 시간을 만든다는 것을 그 손이 증명하고 있었다. 장인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휴대폰으로 음악을 틀어주며 공연을 돕는다고 말했고, 옆에서 아이는 작은 앰프의 볼륨을 올렸다 내리며 리허설처럼 장난을 쳤다. 나는 현대의 소리가 전통의 몸짓을 침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빈 곳을 메우기도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다음 날 새벽, 다시 왕사원을 찾았다. 하늘이 푸르게 밝아오는 사이, 종소리가 2번, 3번, 5번 규칙적으로 울렸고, 승려들이 맨발로 경내를 한 바퀴 돌았다. 전날 밤 흰 막에 떠오르던 그림자들이 사원의 회랑 기둥에 잠깐 스쳐 가는 듯했다. 전통은 어제의 공연으로만 남지 않고, 다음 날의 생활로 이어졌다. 사원 앞 노점에서 나는 작은 금박 한 장과 재스민을 샀다. 금박을 조심스레 부처님 상호에 붙이고 두 손을 모으자, 금빛이 깜짝 전등처럼 반짝했다가 이내 조용히 눌어붙었다. 빛이 서둘러 사라지지 않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나콘시탐마랏을 떠나는 버스 터미널에서 나는 어젯밤 장인이 준 새 모양의 종이 패턴을 꺼내 여행 노트 첫 장에 붙였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얇은 그림자가 글자 위로 흐르며 문장을 다른 표정으로 바꿔 주었다. 이 도시는 내게 두 가지 약속을 남겼다. 하나, 빠르게 배우는 대신 오래 듣기. 둘, 크게 말하기보다 정확히 움직이기. 남탈렁의 광대가 바람을 받아 대사를 바꿨듯, 나도 일상의 바람에 따라 작은 계획을 가볍게 고쳐 보자고. 버스가 출발하자 창밖으로 첨탑의 흰 선이 마지막으로 스쳤다. 종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 리듬을 나는 알고 있었다. 전통은 멀어지는 풍경이 아니라, 내 걸음 안쪽으로 옮겨 붙는 속도였다. 다음에 다시 이곳을 찾는다면, 나는 먼저 사원의 그림자에서 한동안 서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해가 기울 무렵, 흰 막 앞에 다시 앉아 칼끝과 목소리가 만들어 내는 느린 밤을 오래, 아주 오래 바라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