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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서 들은 태국어, 낯설지만 아름다운 언어

by Koriland 2025. 8. 24.

골목과 시장에서 처음 만난 태국어의 소리

 방콕에 도착하자마자 내 귀를 사로잡은 건 클랙슨도, 상점 스피커도 아니었다. 노점 사이를 오가며 부딪히던 짧은 인사, “사와디캅/사와디카”였다. 끝음을 살짝 올리며 미소를 얹는 그 소리는 인사이면서 리듬이었다. 꼬치를 굽던 아저씨는 “아러이 막!” 하고 엄지를 세웠고, 카페 직원은 계산이 끝날 때마다 “캅쿤 캅”으로 낮게 마무리했다. 태국어가 성조를 가진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거리의 성조는 책보다 한층 더 살아 있었다. 같은 음절이 높낮이와 곡선을 달리할 때 전혀 다른 표정이 된다. 평평하게 흐르는 말투는 안정, 높게 시작해 떨어지면 단정, 낮게 깔았다가 끝을 올리면 질문과 여지. 버스 안내방송의 억양은 내비게이션보다 친절하게 다음 정류장을 알려 주었고, 시장의 상인들은 가격을 부를 때 말미를 올려 여지를 남겼다. “싼 마이?”에 웃음을 얹으면 농담이고, “다이 마이?”의 가벼운 상승은 타협의 신호였다. 택시 안에서는 “유 티 나이?”가 방향을 고치는 회전등이 되었고, 사원에서는 합장과 함께 끝을 낮춘 “사와디캅”이 공손함을 더했다. 처음 듣는 말들이었지만, 소리의 표정이 뜻을 절반쯤 설명해 주었다. 숙소로 돌아온 밤, 나는 오늘 들은 리듬을 노트에 받아 적었다. 사와디의 s는 잔잔하게, 와의 모음은 둥글게, 디는 짧고 또렷하게. 목소리의 선을 따라 쓰다 보니 발음은 문법보다 먼저 손에 익었다. 언어가 규칙이기 전에 풍경이라는 걸, 그날의 골목이 가르쳐 주었다. 다음 날 같은 노점을 지나며 나는 무의식적으로 끝음을 올렸다. 아주머니는 내 발음이 어제보다 낫다며 크게 웃었고, 그 웃음은 낯선 도시에서 내 어설픔을 허락해 주는 입장허가서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길의 리듬에 한 발 더 가까워졌다.

간판과 메뉴 사이, 글자가 춤추는 도시의 문장

 간판을 읽는 일은 도시를 읽는 일과 비슷했다. 태국 문자는 첫눈에 그림 같았다. 자음이 먼저 서고 모음은 위·아래·옆에서 감싸며, 작은 원과 길게 뻗은 꼬리가 단어의 박자를 만든다. 띄어쓰기가 드물어 처음엔 어디서 끊어야 할지 당황했지만, 곧 호흡이 쉼표가 되고 아이콘과 숫자가 마침표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쌀국수집의 둥글고 두꺼운 획은 든든함을, 디저트 가게의 가느다란 획은 달콤한 잔향을 그렸다. 야시장 가격표의 ‘20/30/40’ 곁에는 고추 그림이 붙어 있었고, 빨간 고추 세 개는 말없이 “정말 맵다”를 뜻했다. 메뉴판을 펼치면 라틴 표기가 없는 줄이 많았지만, 나는 소리값을 힌트 삼아 ‘쏨땀’ ‘가이양’ ‘카오니아오’를 찾아냈다. 모르는 단어 앞에서는 웃으며 손짓으로 매운 레벨을 묻고, 점원이 숫자를 적어 주면 “마이 펫, 펫 니트노이”라고 다시 조정했다. 카페에서는 “마이 사이 탕캄”이라며 설탕을 빼 달라고 했고, 바리스타는 “싸이 남판?” 하고 되물으며 얼음을 더할지 확인했다. 도심의 로만자 표기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한 간판은 ‘Rod Dee’를, 다른 간판은 ‘Rot Dii’를 썼고, 길모퉁이 로티 가판대의 ‘Roti’는 입에서 ‘로-티’로 길어졌다. 같은 단어도 표기와 소리 사이를 오가며 작은 변주를 만들었다. 지하철역 표지판은 태국어와 영어가 나란히 서 있었지만, 시장 골목의 전단지는 온통 태국어뿐이었다. 대신 글자 사이에 숟가락, 물고기, 망고 같은 픽토그램이 들어가 있어 뜻을 짐작하게 도왔다. 나는 그 그림들을 단서 삼아 주문했고, 계산대 앞에서는 숫자가 가장 좋은 통역이 되었다. 40, 60, 100, 120. 숫자를 따라가다 보니 발음도 따라왔다. 길가의 작은 포장마차에서 ‘ข้าวเหนียวหมูปิ้ง’이라는 글줄을 보고, 옆의 라틴 표기 ‘Khao Niao Moo Ping’을 소리 내어 읽는 사이, 내 혀는 도시의 박자에 한 음표 더 가까워졌다. 글자는 풍경의 일부였고, 풍경은 곧 문장이라는 걸 그날의 간판들이 알려 주었다.

낯선 입모양과 친해지는 법, 아름다움으로 남은 문장들

 교실 밖의 수업은 밤이 깊을수록 더 흥미로웠다. 노상 테이블에서 “펫 니트노이”를 열 번 연습하자 아주머니는 웃으며 고추 하나를 빼 주었다. 다음날 같은 가게에 가서는 “오늘은 펫 막 막”이라고 장난을 쳤고, 아주머니는 장갑을 끼며 고추를 한 움큼 더 얹는 시늉을 했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공기가 발음을 용기로 바꾸었다. 사원에서는 합장과 함께 “사와디캅”의 끝을 낮춰 공손함을 더했고, 편의점에서는 빠르게 흘러가는 문장이 낯설 때 “마이 카오자이”라고 솔직히 말했다. 그러면 점원은 속도를 낮추고 입모양을 크게 만들어 주었다. 택시에서는 목적지 앞에 “바이(가요)”를 붙여 문장을 단순하게 만들었고, 길을 물을 때는 “유 티 나이?”로 끝을 올려 여지를 남겼다. 뜻을 몰라도 목소리의 표정이 의미를 채웠다. 공원 무대에서는 학생들이 몰람을 부르며 이산 방언을 섞었다. 후렴의 마지막 음을 길게 끌다가 툭 끊는 습관은 이 도시의 저녁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나는 휴대폰 메모에 하루 동안 마음을 움직인 소리를 적었다. “정말 맛있다: 아러이 막”, “괜찮아요: 마이 펜 라이”, “조금만 매워요: 펫 니트노이”. 나중에 보면 철자가 틀린 줄도 있었지만, 메모의 역할은 정확함보다 용기의 기록에 가까웠다. 발음을 붙잡으려면 입모양을 그려야 한다는 걸 깨닫고, ‘캅’의 ㅂ을 입술 안쪽에서 부드럽게 닫는 순간을 거울로 확인했다. 밤이 더워질수록 소리는 느긋해졌고, 문장은 길어졌다. 주문을 마치는 끝의 “ครับ/ค่ะ”는 말에 부드러운 보자기를 씌우는 마무리였고, “นะ”는 말의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주는 연필깎이 같았다. 언어의 규칙은 사전에 있지만, 언어의 아름다움은 사람 사이에 있었다. 헤어지기 전 노점 아주머니는 “라-웬”이라며 다음에 또 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 말의 높낮이를 그대로 따라 하며 “쑤어이 막”이라고 오늘의 밤을 칭찬했다. 뜻이 완벽히 맞지 않아도 괜찮았다. 서로의 억양이 웃음을 만들었고, 웃음은 다음 문장을 불러왔다. 그렇게 나는 낯선 언어와 천천히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태국어가 낯설지만 아름다운 이유는, 문장이 입에서 나올 때마다 상대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가게 만드는 그 따뜻한 박자 때문이라는 것을.